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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환 목사 |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 속에 걸어온 나의 삶 17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가 하나가 된 
신학교 교장 
Archibald Campbell(감부열 선교사) 


I. 나의 신앙과 신학
6·25 동란 직후
동부교회는 강흥수 목사님이 시무하였고, 서부교회는 조선신학원 출신인 이윤학 목사가 담임하고 있었다. 제주시에서 겨울을 지낸 어떤 날 박형용 교장으로부터 소식이 왔다. 그도 역시 제주도 성산포에서 피난하고 계셨는데, 봄이 되고, 전쟁이 장기화 되는 형편이어서, 그냥 섬에 남아 있을 수가 없으니, 부산으로 나가서 피난 신학교를 열자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제주 생활을 청산하고 부산으로 나갔다. 부산진 교회(김성여 목사 시무)에서 수업을 하기로 하고, 나는 신학교 근처 곧 좌천동 등성이 어떤 과부 할머니댁 한 간을 전세로 얻었다. 부산진 교회는 화강석으로 새 교회당을 짓고 있었고, 아래층은 아직 미완성 상태였다. 그래서 학생들은 2층 예배실, 의자도 없는 마룻바닥에 앉아서 수업을 들었다. 서울 남산의 수업 형편과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1.4(1951년) 후퇴 때에 평양신학교 학생이 대거 남하하여, 부산까지 와서, 우리의 피난 신학교에 편입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때 평양서 온 그룹에 임옥, 임인식 등이 있었다. 피난 학생들의 생계가 묘연하였다. 부두 노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남의 집 물지게를 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피난 신학교에서 공부한다는 것, 그리고 교육한다는 것이 얼마나 내용적으로 허술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지 않는가? 
우리가 부산진 좌천동에 있을 때, 제주도지사 관저에 계시던 장모님(현태룡 목사 사모님) 김태신 여사가 작고하셨다. 우리는 그 비보를 듣고도 부산을 떠나지 못하고, 문상을 가지 못했다. 내가 미국 유학 중, 제주도에 피난 생활을 하시던 목사님들 중, 나의 장인의 친구 목사들이, 중신을 하여 내 장인 현태룡 목사와 김지호 전도사(동부교회 시무 전도사)와 짝을 지어주었다. 그래서 나의 처와 아들이 재혼한 장인의 가족의 돌봄을 받으며 나의 귀국을 기다렸던 것이다.
정부가 부산에 와 있고, 전국의 모든 기관도 부산에 밀집하여 비정상적인 행정과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1951년 5월 21일에 장로회총회도 부산시 대청동에 있는 중앙교회에서 개최되었다. 1950년 4 월 대구 제일교회에서 비상 정회를 한 계속총회가 개최된 것이다. 거기서 신학교 합동안이 통과되었다. 즉 장로회신학교와 조선신학교를 하나로 만든다는 안이었다. 우선 그 양측의 교명을 버리고 “총회신학교”로 개칭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양측의 교장을 물리치고 우선 선교사 감부열(Archibald Campbell)을 초대 교장을 삼는다는 것, 다음은 이사진을 선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교수진을 구성하게 한다는 안이었다. 거기서 이사들을 선정한 바, 압도적으로 장로회신학교 측에 유리한 사람들이 선정되었다. 그래서 그 결정에 도저히 승복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조선신학교 측 회원들은 반기를 들었고, 마침내 우리 교단을 탈퇴하고, 별도의 총회를 조직하기로 했고, 아울러 조선신학교는 종전대로 존속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 학교가 후에 한국신학대학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지금은 한신대학교로 개칭됨).
신학교 이사는 각 노회 대표 2인과 각 선교회 대표 1인씩으로써 구성되었고, 5월 30일에 모인 이사회에서 이사장에 권연호, 서기에 노진현, 회계에 김광현을 선출하였다. 7월 25일에 제2차 회의를 열어 아래와 같이 교수진을 구성했다. 
교장 Archibald Campbell(감부열 선교사)/ 교수 인톤/ 조하파/ 박형용/ 계일승/ 권세열/ 한경직/ 김치선/ 명신홍
강사는 교장이 추천하여 실행이사회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나와 김윤국 목사는 새 신학교의 강사로 선정되었다. 따라서 장로회신학교는 제4회 졸업생을 내고 폐교하였다. 부산진교회 예배당에서 제4회 졸업식이 1951년 7월에 거행되었고, 동년 9월에 대구 남산동에 있는 미국장로교선교사 사택 단지의 한 동을 교사와 기숙사로 하여 총회신학교가 개교 되었다. 서남교회와 서문교회도 교실로 사용되었다. 내 가정은 우선 서남교회 교육관 한 칸을 얻어 살다가, 후에는 서무로 발탁된 김창준 집사 가정과 함께 학교 구내에 있는 집에서 살았다. 

제1차 미국 유학
나는 대구에서 일년 간 헬라어를 가르치고 있는 동안, 제주도 피난 시절에 번역한 히브리어 교본 등사본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다. 내가 번역한 원고를 철판(가리방)에다 초종이를 놓고 철필(鐵筆)로 긁어가지고, 등사를 하여, 200부를 찍었다. 등사와 제본은 최의원 학생이 맡아서 했다. 결국 한국에서 히브리어 교과서가 정식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 때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실시한 교회지도자양성 프로그람에 발탁이 되어 미국 유학을 추진하게 됐다. 김윤국 목사와 함께 부산에서 문교부 주관 유학시험도 치고, TOEFL 영어 시험도 치고, 미국 비자 신청도 하고, 미국 뉴욕에 있는 Biblical Seminary의 입학허락도 받았다. <계속>


박창환 목사
전 장신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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