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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환 목사 |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 속에 걸어온 나의 삶 14

구내에 같이 사는 최연옥(유여대 목사의 아들 유의성의 부인(후에 최以信으로 개명)이 신학교 학생으로서 나의 영어반에서도 공부를 하는 분인데, 영락교회 성가대에서 같이 친하게 지내는 현수삼이라는 처녀를 나에게 소개하는 것이었다. 명동 전주교회 부속 유치원 즉 계성유치원 교사이고, 영락교회 성가대 부반주자이기도 한 여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무과장이면서, 장로회신학교 영어강사로 신학교에서도 가르치는 현수길 선생의 여동생이고, 그녀의 아버지는 현태룡 목사라는 것이었다. 그녀를 소개 받은 나는 아무 저항도 없이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다. 영락교회에 가서 그녀를 몇 번 멀리서 바라보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마음을 결정하고 그녀와 결혼하기로 했다. 친구 김동수 목사가 현태룡 목사를 찾아가 정식으로 나를 소개하고, 결혼 승낙을 받았다. 나는 그 집에 가 보지도 않고 결정을 한 것이다. 나는 남한에 친척이 없는 고아와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 집에서는 신학교 전임강사라고 나라는 사람을 좋게 보고 결혼 승낙을 한 것이다. 1950년 5월 30일에 서울 동숭동에 있는 서울대 법대 교무처장 사택에서 박형용, 한경직, 강신명 등 여러 목사님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약혼식을 성대히 가졌다. 30세가 지나서 결혼하겠다던 나의 생각이 눈 녹듯이 녹아버린 것이다. 약혼반지와 시계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되서 6·25 전쟁이 터졌다. 


조선신학교에 대한 획책

조선신학교를 견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보수 계열, 다시 말해서 정통보수를 표방하는 세력의 제1차 계획은 1948년 6월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움으로 일단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그것으로 완전히 달성 된 것이 아니었다. 제2단계로 장로회신학교를 남한 장로회총회 직영신학교로 만드는 일이었다. 1949년 4월 새문안 교회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그 안을 안전하게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비상수단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조선신학교를 지지하는 세력이 결코 무시할 수 없으리만큼 크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즉 함경도 출신 목사들과 호남 지역 목사들이 대거 단결되어 있었고, 서울 지역의 교회들도 상당수가 그 세력에 가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짜낸 수단이 무(無)지역(地域) 이북 노회들을 남한 총회에 가입시키는 안이었다. 고향을 잃고 피난한 이북의 다수 신도들과 교역자들을 동정하고 위로한다는 뜻도 있고, 이북을 속히 회복해야 한다는 염원도 담아서, 이북의 피난 무(無)지역(地域) 노회들을 승인하자는 것이었다. 그 당시의 시국 정서(情緖)로서는 그 안의 통과가 무난한 것이었다. 그 안이 통과됨으로써 장로회신학교 총회 직영(直營)안 통과도 압도적인 찬성표로 이루어졌다. 그 제2단계가 이루어지자, 다음 단계(제3단계)로 넘어갔다. 그것은 한 총회 안에 직영신학교가 둘이나 있을 필요가 없으니, 그 둘을 하나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국 조선신학교를 없애버리자는 말에 불과하였다. 
한경직 목사가 두 신학교의 합동안을 제출하고 합동위원 7 명을 선정했다. 위원은 남궁혁, 이대영, 배은희, 윤하영, 이창규, 안두화, 인톤이었다. 총회 후 잔무를 총회임원회가 취급하게 되었는데, 임원회가 4:4로 의견 대립이 되어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1950년 4월 총회를 대구 제일교회에서 모였다. 경남노회 문제로 소란한 가운데 임원선거도 못한 채 정회로 들어갔다. 총회임원과 증경총회장 연석회의에서 동년 9월 19일에 청주에서 속회할 것을 결정했다. 신학교 문제는 청주에서 7월 상순에 연석회의를 열어 성안을 얻어 노회에 수의하여 결정한다는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비상 정회를 한지 약 두 달 만에 6·25 동란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다음날의 서울 중심부


6.25 동란과 장로회신학교

 1950년 6월 25일은 주일이었다. 모두가 고요히 잠자고 있는 주일 새벽에 김일성(본명 김성주)은 남한을 점령하기 위해서 진격명령을 내렸다. 나는 그 주일에 영락교회에서 예배를 드렸고, 다음 날 아침에 신학교에 올라갔다. 멀리 동두천 쪽으로부터 대포 소리가 쿵쿵 들려오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식 방송을 통하여 “국군이 잘 싸우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말을 연방 내 보내고 있었다. 다음 날 다시 학교에 올라가니 출석한 학생이 많지 않았다. 결국 당분간 휴교한다는 광고를 써 붙이고 헤어졌다. 
그러는 동안 미국 선교사들은 적어도 목사들만은 남쪽으로 피난시키자는 계획을 세우고, 목사들과 그 가족들을 트럭으로, 혹은 열차로 속속 한강을 건너게 했다. 그 때 나는 아직 목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구제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불가불 서울에 남아서 전쟁을 겪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서울에는 이미 인민군이 많은 탱크를 앞세우고 진입하여, 거리 거리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숨어 있던 좌익 세력과 남하한 인민군들의 활동으로, 우익 인사들, 특히 목사들이 색출되고 검거되어 이북으로 끌려갔다.  <계속>


박창환 목사
전 장신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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